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과 연구다빈치 박물관이 있는 앙보아즈Amboise 마을은 프랑스 남부의 뚜르Tours에 작은 마을로 인근에는 루아르Loire 강을 끼고 있다. 기름진 넓은 땅과 세계문화의 유산으로 꼽히는 오래된 고성들은 중세 시대로부터 프랑스 왕이나 귀족들의 휴양지로 사용되었던 화려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오랜 전통과 역사 속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뚜르 시에서 300킬로쯤 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다빈치가 말년을 보냈던 앙보아즈 마을을 만난다. 다빈치는 후원자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망한 1516년 이후 로마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프랑수아 1세의 후원제안을 받아들여 밀라노를 떠났다. 프랑스에 머무르며 많은 창작물들을 제작하였는데 문화 예술 분야에 최고의 실력을 가진 폭넓은 후원자였던 프랑수아 1세는 다빈치를‘최고 화가이며 건축가이자 엔지니어’ 라고 예우하며 노년의 다빈치와 정치 경제와 철학을 이야기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조르조 바사리는 ‘왕의 품에서 죽는’레오나르도 다빈치 라는 표현으로 프랑소아1세와 다빈치의 관계를 단적으로 설명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있는 앙보아즈 성에는 탁 트인 잔디정원 중앙에 다빈치 동상이 서 있어 성 안에 있는 그의 무덤을 찾는 방문객들을 바라본다. 마을로 내려와 성과 그리 멀지 않는 곳에는 다빈치의 집 클루 성(지금의 클로뤼세)이 있다. 지금은 다빈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에는 잘 다듬어진 넓은 정원과 다빈치가 기거하던 침실과 주방 그리고 늘 연구에 몰입하던 크고 작은 연구실 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빈치가 고안한 기계를 직접 만들어 둔 여러 모형들을 전시해뒤었는데 세계 최초의 자전거 모형이나 자동차는 물론 비행기계, 기중기, 움직이는 다리, 요새와 무기 등 시대를 초월한 천재성의 결과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영역을 넘나들면서 연구한 흔적들을 보면서 감탄함은 물론, 이렇게 무한한 창조적 아이디어의 원천이 어디였을까 그리고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천재 화가 다빈치는 그 예술적 재능만큼이나 다양한 영역을 경계 없이 넘나든 연구자로서 세상을 놀라게 한 창의성과 천재성의 대명사가 되어 재조명되었다). 해부학과 동물학, 공기역학, 건축, 식물학, 토목공학, 군사공학, 화석 연구, 수로학, 수학, 기계학, 음악, 광학, 철학, 로봇 공학, 천문학, 그리고 무대 설계와 의상 디자인, 포도 재배술까지. 과학적인 논문과 문학적인 글뿐만 아니라, 장 볼 목록까지 그대로 남은 이 기록들은 레오나르도의 모든 호기심의 집약체였다. 아직도 다빈치가 남긴 낙서에서의 그림이나 글들은 밝혀내고 연구해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던 1452년 4월 15일 새벽3시 토스카나Toscana 지방, 공증인인 세르 삐에로 Ser Piero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의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안드레아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약 11년간 수학한 그는 1477년경 자신의 작업실을 장만하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화풍을 세상에 알렸으며 1482년 피렌체를 떠났다. 밀라노에 도착한 다빈치는 루도비코 일 모로에게 자신의 능력(회화와 조각외에도 특히 군사 분야의 공학능력을 강조한)을 설명하는 일종의 이력서를 보내 그의 후원을 받는다. 훗날 프랑스의 루아르 성의 프랑소아 1세를 마지막까지 섬겼던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의 그림으로 르네상스의 3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단순히 위대한 화가로만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자각하는 것이었다. 연구에 대한 열정은 피렌체, 밀라노, 로마 그리고 마지막 거처인 프랑스에서 죽을 때까지 이어져 물리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그리고 의학자로써 왕들과 사회에 봉사했다. 왕성했던 다빈치의 연구는 7천 페이지 가량의 원고, 1967년 마드리드에서 우연히 발견된 두 권의 노트에 담겨있다(생각의 흐름이 자유롭게 기록된 1만장에 달하는 다빈치의 노트는 훗날 제자인 프란체스코 멜치에게 유산으로 남겨졌고 그의 사후 안타깝게도 산산이 분해되어 삼천 장 이상이 사라져버렸다. 최근 몇 십 년의 노력 끝에 한자리에 모인 7천 여장의 그의 연구기록은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온갖 전문가들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300년 후에나 가능했던 기술들을 앞서 생각하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가 평생 동안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가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그는 자신의 노트에 “자연을 경험하려면 홀로 있어야 한다."고 적었다. “홀로 있을 때는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 친구 한 명이 곁에 있다면 자신의 반은 없다고 봐야 한다. 화가는 사람들과 떨어져 자연 물체의 형태를 연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고독을 향한 화가의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라는 글귀를 보아 그가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스스로 외로움을 감수해야 했던 고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늘 새로운 펜을 쓸 때마다 자신에게 “말해달라”라는 글귀를 늘 끄적거렸고 이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되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해답을 얻고자 하는 스스로에게 말해달라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12년 전 루브르 박물관에서 많은 인파 속을 비집고 보았던 모나리자의 그림을 기억한다.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에서 유독 관람객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던 시대의 명작이었지만 나는 다빈치의 천재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서야 비로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관점에서 회자되었던 인류 최고 천재인 그의 진면목을 절감한다. 이번 취재를 마치고 루브르의 모나리자 그림 앞에서 다시 서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