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빌(Belleville)역에 내리자마자 이곳을 빨리 탈출해야만 한다는 불안감이 들었다."파리 여행기를 포스팅한 어느 블로거가 파리 20구에 관해 남긴 말이다. 그렇다. 지하철 11번 벨빌역에 내리면, 복잡하고 지저분한 길을 서성이는 다국적의 유색인들, Tag와 Graffiti로 뒤범벅인 자동차들까지, 위협적으로 느껴질만도 하다. 파리지만 파리가 아닌 곳! 파리 속의 이상한 나라! 국경 없는, 벨빌만이 있는 세계. 예술하는 젊은이들은 대책 없이 당당하고 자유롭다. 그들은 예술의 이름으로 용기를 내고 예술의 이름으로 불씨를 당겨 꽃을 피웠고 가난과 도박, 마약으로 얼룩진 골목과 파리 시의 도시계획으로 허물어질 위기의 벽을 표현의 자유를 구가하며 따그(Tag)와 그래피티(Graffiti)로 지켜내어 이젠 카메라를 들고 찾아 드는 명소로 변화시켜 놓았다. 그래피티는 낙서가 아닌가? 낙서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이 증명된 셈인가! 파리지만 파리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카페 오 폴리(Aux folies-정신나간 이들에게) 옆의 데 누아이에 (rue Denoyez) 골목은 아예 합법적인 낙서 골목이 되어버렸다. 답답할 때 그 곳에 가면 속이 후련해진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롭다. 법으로 규제하지 않아도 착하게 자유롭다. 그 골목에선 처음 만나도 친구가 되고 난폭함이 없다. 그냥 낙서가 즐거운 마음! 딱히 예술성을 논하고 비평할 부담도 없는 자유로움! 그러고 보면 아이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말보다 낙서나 그림으로 더 자유롭고 착해지는 것 같다. 옛날엔 정말 정신 나간 듯한 이들이 드나들던 카페 오 폴리도 이젠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었다. 모두가 낙서가들의 덕분일까? 낙서는 왜 하는 것일까? 입을 열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어리기 때문에, 표현이 서툴거나 소외계층 이기 때문에, 이방인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고 말해도 외면당하는 말을 벽에 적는다. 이상하게도 과격하게 뿜어낸 스프레이로 적힌 뜻이 말과 글이었다면 비난받을 것도 그림이라면 한결 너그러워진다. 가슴에서 나오는 그림이 머리에서 나오는 언어에 승리하였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작은 지도하나를 들고 파리 20구 메닐몽땅의 거리를 걷다 보면 골목길의 낡고 갈라진 벽에서, 슈퍼마켓의 간판 위 혹은 오래된 아파트의 굴뚝 아래에서 바바리를 입은 중절모자의 검은 실루엣의 남자를 만날 수 있다. 그는 빨간 풍선을 들고 NEMO 라 써있는 검은 가방과 함께 서있거나 혹은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벽에 그려져있다. 이 친근한 그래피티는 재미있게도 전산직에 종사하는 아빠가 25년 전 어린 아들의 하교길을 즐겁게 해주려고 그렸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림은 지금 빠리 곳곳에서 시인처럼 말을 거는 대표적인 그래피티가 되어있다. 프랑스 최초의 그래피티 화가인 하얀 해골의 작가 제롬 메스나거(Jerome Mesnager)의 작품들도 눈에 띤다. 특히 마티스의 <춤>을 오마쥬(hommage de Matisse)한 작품은 메닐몽땅가의 도시 미관을 살리는 사랑 받는 Street Art가 되었다. 조금 과장같지만 반항적인 청년들의 돌에 맞아 깨진 경찰서의 창문들도 고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 같다. 카메라를 들고 멀리서 파리 20번째 구역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포커스를 배려하는 친절을 잊지 않기 위해....낙서로 세상의 관심을 받고, 어두웠던 골목엔 이제 그래피티 작가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예쁜 갤러리들도 하나씩 들어선다. 귀족들만 살 것 같은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파리의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냄새 나는 이민자들의 마을이 이제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낙서로 숨을 고르고 낙서로 내가 사는 골목을 사랑하는 방식을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다.